흑심

흑심


서점에 가면 으레 들르는 곳이 있다.
문구를 파는 곳
난 흑심을 품은 연필을 산다.
오늘은 가는 흑심을 품은 연필 한 자루를 샀다.
곧고 매끈한 그 모습에 반했다.

연필깍이 구멍에 넣고 살살 돌린다.
사르륵 사르륵 소리를 내며 뽀얀 속살을 드러낸다.
이내 까만 흑심이 뾰족해 지면서 연필로 거듭난다.
날카로우면서도 부드러운 그 단아함에 흥분한다.

거칠면서도 부드러운 촉감
그 끝이 부러질세라 살포시 감아 쓴다.
어느새 연필의 흑심도 내 흑심도 무뎌진다.
무뎌진 흑심만큼 내 흑심도 토해진 듯
백지에 가득한 흑심의 잔해에 묘한 희열을 느낀다.

난 오늘도 연필을 산다.
그리고 연필을 깎는다.
건조한 기계의 자판을 거부하고 연필을 잡는다.
사랑하는 여인과 하룻밤을 치르듯
흑심에 내 흑심을 담아 거침없이 토해낸다.


소멸의 반복

소멸의 반복 

사무실 앞에 제법 큰 목련 한 그루가 있다.
매일 아침마다 목련과 마주한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목련의 모습에서 시간의 흐름을 확인한다.
밤새 산고를 치른 듯 목련나무 밑에는 낙엽들이 수북하다.
그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앙상한 가지가 파르르 떨고 있다.
잎이 나기 전에 꽃이 피는 목련,
그래서인지 그 꽃은 화려하지만 오래가지 않는다.
꽃이 필 때 꽃봉오리가 북녘을 향한다고 해서 북향이라고도 한다.
목련에 열매가 열린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어른 손가락 크기 굵기 정도의 빨간 열매가 열린다.
꽃이 피면 봄이 오고 열매가 열리면 가을이 온다.
열매가 떨어지고 끝으로 단풍잎이 떨어진다.
겨울이 오기 전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다.
목련의 나뭇가지 끝에는 어느새 털꽃몽우리가 달렸다.
이른 봄에 꽃을 피우기 위해 다른 나무들과는 사뭇 다른 겨울을 준비하고 있었다.
잎이 나기 전에 꽃을 피우면서도 순백색의 고결한 자태를 담을 수 있는 이유를 알았다.
목련은 봄에만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니었다.
겨울로 가는 길목에서 이미 그 꽃을 피우고 있었다.
목련의 일생은 우리네 삶을 닮았다.


고대산의 들녘

들녘이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는 초가을,
연천군의 고대산에 올랐다.
일년에 두 세 번씩 오르는 산이다.
같은 산이라도 오를 때마다 그 느낌이 새롭다.
고대산은 겨울산이라지만 이 시기의 백미는  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철원평야의 황금들녘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황금들녘, 보는 그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풍성해 진다.
단풍은 이른 탓인지 아직은 많지는 않았지만 저마다 물감을 잔뜩 머금고 있다. 
조만간 저마다 제 빛깔을 뽑낼 듯 하다.
가을빛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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